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몽 드 몽포르 (문단 편집) === 헨리 3세와의 대립 === 왕실과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나 싶던 시몽은 [[사보이아 공국|사보이아 백국]] 측에 처남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의 이름으로 빚을 진다.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에[* 그러나 시몽 입장에서는 전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었다. 헨리 3세가 시몽과 결혼한 여동생의 몫으로 줘야 할 지참금을 자기가 보관(이라고 쓰고 삥땅이라고 읽는)하고 있었기 때문에, 시몽은 헨리 이름으로 돈을 빌리면 헨리가 아직 미지급된 지참금에서 지불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. 물론 헨리는 그 지참금을 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...] 분노한 헨리는 시몽을 [[런던 탑]][* 참고로 이 감옥 요새를 하얗게 칠하게 한 사람이 바로 헨리 3세이다.]으로 불러 크게 화를 내며 협박하였고[* 헨리는 --플랜태저넷 혈통답게-- 화를 내며 시몽에게 '네가 내 누이를 유혹했지! 그래서 관대하게도 내가 결혼시켜 줬는데 이게 뭐냐! 가둬 버리겠어!!' 라고 말했다고 한다. 사실 헨리 3세가 이렇게 크게 화가난 이유는 시몽이 멋대로 국왕의 이름으로 빚을 진 것이 국왕에게 빚을 떠넘기는 행위라서 반역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.], 1239년 말에 시몽 부부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. 결혼 1년 만의 일이다. --콩가루 집안-- 프랑스에서 도피 생활을 한 지 1년 만인 1240년에 시몽은 로마 방문 시에 교황과 약속한 대로 십자군 전쟁에 참가, 귀족 십자군(Barons' Crusade)의 일원으로 [[레반트]]로 떠났다. 그는 [[아이유브 왕조]]와의 협상을 통해 포로로 잡혀 있던 형 아모리를 보석금을 내고 석방시켜 주었다. 한편, 당시 헨리 3세는 양아버지[* 헨리의 어머니인 [[앙굴렘의 이자벨]]은 1217년에 존 왕이 죽자 1220년에 뤼지냥 가문[* [[기 드 뤼지냥]]의 가문]의 라마르셰 백작 위그 10세와 결혼하였다. 이자벨은 동시에 [[앙굴렘]] 여백작이었다.]인 위그가 [[푸아티에]]에서 반프랑스 봉기를 일으키자 그를 명분으로 존 왕 때에 상실한 고토 회복 원정에 나섰다. (1242년) 1241년 말에 서유럽으로 돌아온 시몽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헨리와 화해하고 잉글랜드 편으로 참가하였으나 반란군-잉글랜드 연합군은 루이 9세의 프랑스군에게 패하였고, 툴루즈에서 호응하여 봉기한 레몽 7세 또한 알비주아 십자군에 패하였다. 결국 1243년에 이자벨 & 위그 10세와 레몽 7세가 항복, 헨리 3세가 배상금으로 8만 에퀴를 바치며 전쟁은 종결되었다. 그리고 [[루이 9세]]는 [[십자군 전쟁/목록#s-1.10|7차 십자군]]을 준비하였다. 시몽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헨리[* 중간에 프랑스군에게 포위되자 동생보고 협상하라 하고 그 틈에 도망가는 추태를 보였다.]에게 10세기 초의 [[샤를 3세]][*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. [[노르망디 공국]]을 세워 노르만인들을 정착시켰으나 한 여자에 푹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자 923년에 폐위되었고 파리 백작이자 왕이었던 오도의 동생 로베르가 즉위하였다.]처럼 유폐되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고는 루이를 따라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렸다. 다만 시몽은 헨리가 용서해 주어 원정에서 돌아와 가스코뉴의 공작이 되었는데 자치 도시들을 탄압하다가 주민들이 헨리 3세에게 항의하여 헨리도 묵과할 수 없어 결국 해임되었다. (1252년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